눈을 맞는 등신불
원 철
87년도 당시 나는 범어사 보제루에서 제사 한 번 지내면 만원을 받기로 원주스님과 약속 했다.
원주는 원주대로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고 학인인 나는 병이 났으므로 돈이 필요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승려가 몸이 아프면 갈 곳이 없어 집으로 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염불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병원비를 마련해야만 했다.
기득권을 가진 승려들은 사장이고 그 밑에서 사는 승려는 노예에 불과하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이 아프다하면 골치 아픈 중이다 하여 도반들도 멀리하기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벌이를 했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절을 떠나야만 한다.
그 당시 범어사의 원주스님은 나의 사형이었다.
절에서 사형은 세상 사람들의 촌수로 따지면 형제에 해당한다.
원주는 셈이 흐렸는데 그 핑계가 가히 기막힌 예술수준이었다.
스님 염불비 주셔야지요 하면 “다음에” 라고 하면서 미룬다.
며칠이 지나 염불비가 쌓이면 대충 손 잡히는 대로 주면 그만이다.
그 도인 같은 모습이 정당하고 멋있으려면 돈을 더 줄 때 생기는 법인데 항상 필요이하의 돈을 주면서 당당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뚱뚱한 몸뚱이에 황제출신이 입산수도하여 도인이 된 듯한 최고급연기술로 내미는 돈을 받아보면 그 맛을 알 것이다.
그 돈을 받으면서도 고맙다는 표정을 온 세포를 동원해 연기해야만 다음 염불꺼리를 얻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 날은 두 번 재를 지낸 염불비인 2만원을 받으러 원주를 쫓아다닐 때였다.
찾아가면 딴 짓하고 찾아가면 딴 짓하니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사정은 너무나 딱했다.
전립선이 퉁퉁 부어 요도 막아 염증을 일으켰고 그것이 진행되어 신장염으로 번져 생명이 위험하다는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큰병원은 못가고 비뇨기과에서 약이나 타먹는 그런 사정이라 몸과 마음이 절실한 때였다.
그나마 병원을 안 가면 요도가 막혀 삼십 분 이상을 눈물을 짜내야 몇 방울의 오줌이 나왔다.
도반에게 말하면 성병이라해서 놀리니 말할 처지도 못됐다.
처음에 만난 의사는 비임균성요도염이라고 해서 보름간 주사를 맞았고 전혀 차도가 없자 전립선염이라면서 석 달이나 치료를 했다.
그래도 전혀 차도가 없자 청주병원에 보내 진찰케해서 알아낸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성병걸린 몹쓸 중이 되어 망신이라는 망신은 다 당하고 있었다.
원주는 나를 만나자 인상부터 긁는다.
나는 원주스님에게 “스님 병원비를 주셔야 합니다.”하고 말하니 원주는 좌우를 돌아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본색을 마음껏 내퍼부었다.
“야! 내가 니 얘비냐 얘미냐? 왠마 돈 달래? 너랑 나랑 피가 섞였냐 물이 섞였냐. 왜 너한테 돈줘?”
“스님 염불비 2만원입니다.”
“야 너 돈벌려고 중 됐냐? 그러고 중이 생사가 어딨냐? 챙피한 줄도 모르고 병원을 가냐? 그리구 임마 난 니 얘비가 아냐? 알았어?”
“원주스님, 약속 아닙니까?”
“너 시비 거냐?”
나는 그날 노랗기만 한 하늘을 한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동료(도반)가 “원철 웬 청승이냐? 꼴같이 놀아 이 중아, 왜 그러는 겨?”
“병원비가 없어서...”
그 도반은 주머니를 뒤지더니 몇 만원 중에서 천 원짜리 다섯 장을 세어 엄청난 인심을 쓰는 듯이 내 놓는다.
그 당시 절에서 마을까지 가려면 버스비가 오십 원이요 전철이 170 원 이었고 급해 택시를 타려면 범어사까지 2000 원을 주어야 했다.
그 돈을 받으려니 가슴이 저려 병원가기를 포기하고 걸망을 지고 범어사를 떠났다.
떠날 때 도반들의 “넌 못난 놈이야.”하는 표정은 심장을 후벼팠다.
창원 성주사로 갔다. 성주사 주지가 사형이었는데 내 병을 이야기하자 “병원 가!”하고 말만하지 약값하나를 주지 않았다.
이주일이 되도 어떠한 대답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고향인 천안에 오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허긴 병든 거지를 누가 반기랴.
어머니는 중이 왜 집에 오냐며 동네사람 창피하다며 쫓겨냈고 여동생은 오빠 땜에 시집 못갈 것 같다며 원망을 했다.
천하에 어리석은 거지가 어디를 가랴.
그래도 부처님이 좋았다.
각원사의 세계최대 대불을 떠올리니 문득 각원사를 향해 걷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천안 역에서부터 각원사를 향해 걸어가 보니 반나절이 걸렸다.
배고픔을 달래려 공양간에 가서 공양주보살에게 사정을 하니 공양주보살이 찬밥을 내어준다.
밥을 먹으려다 오줌이 마려워 소변을 보려고 나가다 총무스님하고 부딪혔다.
“어 원철스님 웬일이야.”
“잠시 들렸습니다.”
“묵었다 갈건 가?”
“객방을 주신다면 묵고 싶습니다.”
“원철스님은 각원사를 여관방으로 착각하는 것 아냐?”
“몸이 아퍼서...”
“그건 스님 사정이지 각원사 사정은 아니잖아, 어서 가게 여긴 원철여관이 아냐!”
그 때 각원사 공양주보살이 나와 “총무스님 객스님이라도 사람은 사람 아뉴 먹던 밥은 먹여서 보내는 것 아녀유. 진짜 너무하시네.”
그 덕에 밥은 먹을 수가 있었다.
총무스님은 밥 먹고 나면 나더러 오라고 해서는 밥 먹은 대가인지 재미없는 설법을 두 시간이나 들려주었다.
성철스님은 설움밥을 많이 먹어야 중물이 든다고 했다.
절에서 쫓겨나기도 수십 차래 도둑누명 쓰기도 수차래 얻어맞기도 여러 번 심지어는 서울의 사형 절에서는 먹던 밥을 뺏기기도 했다.
신장이 녹아 지장기도 해서 나면 심장이 멎는듯하고 위장이나 다른 장기에 혹이 생겨 죽는다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불사를 하다 소화를 못시켜 몇 달 동안 죽을 먹기도 했는데 이젠 성대에 혹이 생겨 염불도 못하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젠 중으로 늙어간다는 그 사실만 있을 뿐이다.
이 경험을 통해, 나도 너도 똑같은 복제품인 사실을 알건 모르건 서로가 서로를 피해자와 피의자를 반복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임을 배웠다.
나는 그 중에서도 옳은 것만 뽑아내 무영탑을 완성하고 있다.
이제 와서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이 옳다고 주장하랴.
세월은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과거를 지나 현재를 먹고 사는 것인데 말이다.
내 마음의 창밖에 말없이 서있는 등신불이 눈을 맞고 있다.
나에겐 항상 그 고즈넉한 모습이 다가와 가슴을 두드려 주었다.
그래 그런 것이야 그래 그런 것이고말고 암 그렇지 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언제나 안아 줄 듯한 얼굴이 있어서 마음껏 길을 갈 수가 있었다.
안개에 쌓인 길들을 걸어가다 하천을 만나면 돌다리를 놓고 절벽엔 구름다리를 놓았다.
땀방울마다 새겨지는 등신불을 보면서 나의 나를 정리하고 있다.
등신불! 하고 소리치면 떠오르는 얼굴을 희망하면서 괴로움을 잊었다.
무영탑이 다가온다. 무영탑이 다가온다. 그런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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