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보살은 일체중생의 업을 씻어 불법대해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본래 업은 한 생각이 인이 되어 행동으로 옮기면 업이 된다.
업에는 유루업(有漏業)과 무루업(無漏業)이 있으니 유루업은 샘(漏)이 있는 업이요 무루업은 샘이 없는 업이다.
고로 유루업은 유정(有情)의 업이요 무루업은 무정(無情)의 업이다.
유루업 즉 샘이 있는 업은 영원한 것이 아닌, 쓰면 다하는 복업과 악업을 말하나 무루업은 생사의 이치를 깨달아 열반을 얻는 것을 말한다.
유정은 번뇌가 남은 것이요 무정은 도를 얻어 번뇌를 여윈 것이다.
지장보살님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중생 자신의 한 생각으로 인해 일으켜지는 수많은 업을 제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중생 자체에 간직한 지장보살을 되찾게 하려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마음엔 이미 지장보살(불성)이 갖추어져 있으며, 어떠한 불가사의한 인연으로 인해 더러움으로 물들어 각각의 인격을 갖춘 중생이 되었다.
중생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지금의 몸을 자신이라고 집착해 육도에 윤회하는 고통을 받는 것이다.
집착하는 자신의 실체를 살펴보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다.
아상은 나라는 자만 의식이요 인상은 남이다 하는 차별의식이요 중생상은 중생이라는 열등감이요 수자상은 나이에 대한 편협한 집착으로 인한 한계의식이다.
본래 마음엔 상이 없었는데 탐진치 삼독심이 없던 상을 만들어 고통을 준다.
본래 상이 없는 쾌활한 마음을 되찾으면 인도 없고 연도 없나니 무엇을 일러 중생이라고 하며 무엇을 일러 부처라 부르리오.
본래로 마음엔 부처란 이름도 중생이란 어리석음도 없다.
고로 지장보살님은 중생을 제도한 적이 없이 본래로 한적하시다.
지장보살이 중생을 제도했다 해도 위대한 스승을 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장보살님의 본래 마음은 공해서 상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이 법당에 와서 지장보살을 모시고 공부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지장보살을 완성하기 위해서지 존상의 상과 본인의 모습을 위해서는 아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오늘 법회를 보는 것이다.
나무 지장보살. 나무 지장보살. 나무 대원본존 지장보살 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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